밤을 잊은 노동, 더 이상 ‘신화’ 아니다

주 52시간’ 경제 새판짜기 과제 1회 일과 여가, 기울어진 운동장

2회 달라지는 직장 문화

3회 비인간적 과로사회의 민낯

5회 노동과 노동자의 미래


“오늘은 밤을 새워서 달성한다!”

4년 전 거제의 한 대형 조선소. 본사 생산관리자가 오후 5시쯤 무전을 치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노동자 수백명이 모였다. 평소에는 많아야 몇십명이 일하던 해양플랜트 작업구역은 미어터질 지경이 됐다. 이들은 ‘물량팀’이라고 부르는 임시 노동자들이었다. ‘돌관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공정률이 떨어져 납기일을 맞추지 못할 것 같을 때 밤샘 노동을 하는 것이 돌관작업이다.

본사와 협력업체의 정사원(상용직)들은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6시쯤 일을 마친다. 조를 짜서 야근하느라 퇴근시간이 오후 6시, 8시, 10시로 나뉘어 있다. 정규직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물량팀은 남아 이튿날 새벽까지 일한다. 조선소 인근의 식당과 포장마차들이 조선소와 함께 24시간 내내 불을 밝혔다. 거제에서 돈이 도는 방식이었다. 산업 재해도 끊임없이 발생했지만 ‘불황을 모르는 도시’라는 칭송에 묻혔다. | 관련기사 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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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구조조정 이후로 이 같은 풍경을 요즘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장시간 노동을 빼고 한국 경제를 말할 수 없다. 성장의 심장이었던 제조업도,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골목까지 퍼뜨리는 자영업도 장시간 노동의 토대 위에서 돌아갔다. 한국이란 공간 자체가 돌관작업이 이뤄지던 하나의 조선소였다.

‘조선소’의 활력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지난해 제조업 가동률(71.6%)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조선·자동차 산업에서는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내수는 좀처럼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용은 악화되고 있다. 지난 2월 30만명대에서 10만명대로 떨어진 신규 취업자 수는 지난달 7만명대까지 떨어졌다. 장시간 노동을 밑천으로 쌓아올린 경제가 뿌리부터 흔들린다면, 위기의 원인 역시 장시간 노동과 이것이 가능했던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한국 경제의 질적 도약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가 됐다.

◆선순환< 고용↑ →소득↑ →경기회복 >이냐 악순환< 생산↓ → 고용↓ →경기침체 >이냐…노사 새 화두는 ‘일과 돈의 균형’

노동시간 단축의 경제학

300인 이상 사업장의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다음달 시행된다. 노동시간 단축의 첫 번째 이유는 노동자 건강이다. 노동자가 건강한 상태에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노동시간 단축의 경제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용노동부의 2016년 조사를 보면 146만명이 주 52시간 이상 일한다. 이들의 연간 초과근무시간은 도합 983만시간이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고용직과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96만명이 연간 3조5000억원을 추가근로수당으로 받으면서 648만시간 더 일한다. 올 7월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될 근로기준법은 주 52시간 노동을 연장근로시간을 포함한 노동시간의 상한으로 정했다. 96만명은 누군가에게 일을 나눠주거나, 짧은 시간 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거나,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

■ 2개의 정반대 시나리오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14만~18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한국경제연구원은 기업이 현재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연간 12조3000억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휴일근로수당 중복가산 적용 등에 따라 기존 노동자들에게 연 1754억원을 더 지급해야 하고, 노동시간 단축으로 예상되는 인력분 26만6000명에 대한 추가 노동 비용으로 9조4000억원이 더 들어간다는 것이다. 노동계에 따르면 고용이 늘면서 경제는 성장하고, 재계에 따르면 기업의 생산활동 위축으로 경제는 위기에 빠진다.

과거 사례를 보면 법정 노동시간 단축은 성장을 가져왔다. 생산성 향상 때문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박윤수·박우람 연구위원이 2004~2011년 국내 10인 이상 제조업 1만1692곳을 대상으로 분석해보니 주 5일제가 도입되자 근무시간이 평균 2.9%(연간 70시간) 짧아졌고 생산성은 1.5% 향상됐다. 주 40시간 이상 근무를 하던 곳에서는 생산성 향상률(2.1%)이 평균보다 높았으며 효과는 주 5일제 도입 이후 나타났다.

박윤수 KDI 연구위원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산성이 향상됐다는 것은 이전에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의 건강을 상하게 하는 초과 노동시간을 우선 제거하고, 다음은 업무시간 중 비효율적 시간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경제인 단체의 노동시간 비용 추산은 생산성 향상 효과를 배제하고, 현재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비용을 부풀렸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는 동안 산업재해도 줄어들었다. 산업안전관리공단에 따르면 재해율은 2003년 0.77%에서 지난해 0.48%로 줄었고 같은 기간 사고성 사망만인율도 1.24%에서 0.52%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노동부의 분석에 따르면 주당 노동시간이 1% 감소할 때마다 산업재해율은 3.7% 낮아지고 노동생산성은 0.79% 높아진다. 산재로 인한 근로손실일수는 2016년 4703만522일(1일 8시간 기준)로 노사분규로 인한 손실일수(203만5000시간)보다 23배 높다. 지난해 산재로 인한 직간접적 비용은 22조원으로 추정된다.

■ 한계 봉착한 장시간 노동 경쟁력

돌관작업 등 파행적인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떨어진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 조선업이 1990년대 세계 1위로 올라선 과정이야말로 기업이 노동시간 단축에 생산성을 높여서 대응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1989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법정 근로시간을 주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했다. 주요 중공업 기업들은 1980년대 후반 대대적 설비투자를 확충한 상태에서 고용을 늘린 반면, 줄어든 시간에 맞춰 노동자들을 타이트하게 관리했다. 1994~1995년 대우조선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990년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강도가 2배 이상 올라갔다고 느낀다고 했다(이은진 <노동자가 만난 유령: 자본과 기술>).

사측은 그러면서도 장시간 노동을 유도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물량이 쏟아졌다. 한국은 선박을 주문대로 빠르게 생산하는 데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었다. 기계를 돌릴수록, 오래 일할수록 이익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야근을 수용하고 파업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노무관리의 최고 목표였다. 가족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회사가 주기적으로 노동자에게 유흥을 제공하는 문화도 이 시기에 정착됐다. 동시에 장시간 노동에 따른 비용 부담을 줄이고 노동자를 통제하기 편하도록 사내하청도 늘려나갔다. 기본급은 낮고 휴일·연장 근로수당으로 고임금을 지급하는 임금정책을 유지하며 노동계 내 격차를 키워왔다.

조선업계 장시간 노동 유도 위해

회식 문화 ‘가족적 분위기’ 강조

비용 감축·통제 편의 사내하청도

2010년대 신기술 해양플랜트 도입

밤샘 ‘돌관작업’으론 해결에 한계

장시간 노동, 일·가정 불균형 초래

노동시간 줄면 산업재해도 줄어

일자리 증대·내수 진작 등 미지수

생산성 향상 저성장 돌파구 찾아야

가족 같은 회사라는 이념과 장시간 노동으로 확보한 경쟁력은 한계에 봉착했다. 2010년대 해양플랜트 등 고숙련 신기술을 도입해야 했을 때 추가근로와 속도전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젊은 엔지니어들은 가족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잦은 회식과 감정노동이 자기계발 기회를 빼앗는다고 여기며 회사를 떠났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해양플랜트 산업에 진출했다가 공정률이 나빠지자 비정규직을 극단적으로 동원하는 형태인 돌관작업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비스업이나 관리·사무직 분야에서도 낮은 생산성이 장시간 노동을 초래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16년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매킨지와 함께 8개 기업을 분석해 ‘퇴근 전 갑작스러운 업무 지시’나 ‘불명확한 업무 분장’이 야근의 주원인으로 지목했다.

산업 분야가 다양해지고 여성 노동력 활용이 국제경쟁력의 중요한 요인이 되면서 장시간 노동과 경쟁력은 더욱 멀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연구에서 “일과 가정의 균형이 깨졌다”는 응답 비율은 주 52시간 이상 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미만 노동자들보다 9배 더 높았다. 김영옥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시간 노동은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을 부담하는 여성들에게 경력단절, 재취업의 어려움이라는 비용을 초래한다”며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 노동시간 단축으로 경제 새판 짜기

노동시간 단축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약 104만명의 노동자가 월평균 34만8000원가량 임금이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노동자의 삶을 봤을 때 돈과 시간 중 선택해야 한다면 시간”이라며 “생산성이 오르면 임금은 다시 오르므로 초과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과도기적 임금 감소는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다만 기업은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자 부담을 최소화하고, 정부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들이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복잡한 임금체계를 손질하는 것이 정부가 시도해야 할 가장 시급한 보완 대책으로 꼽힌다.

새로운 일자리가 쉽게 창출될지는 미지수다. 노동부는 다음달부터 주 52시간이 적용되는 300인 이상 사업장 중 600여개 기업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비해 1만9000명을 채용할 계획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지만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없다. 일부 직종에서는 근로기준법 준수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 시행을 앞두고 조선업계는 조선소별로 대책반을 구성해 논의 중이지만 평균 6~8개월간 바다에 나가야 하는 선박의 해상 시운전 업무만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1990년대와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사내하청을 늘리고 자회사로 조직을 분할해 법망을 피해가거나 시간당 노동강도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당국은 이 같은 문제점들이 현실로 드러나 노사가 해법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일을 할 때 시간의 개념이 중요하지 않았다”며 “노동시간 단축으로 앞으로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일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경제의 ‘밑그림’을 새로 그리는 작업이다. 노사관계를 포함해 경제의 근본적 구조를 바꾸고, 저성장을 돌파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 52시간 근무제 위반 사업장에 대한 단속이 6개월 늦춰져 이 작업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김재광 노동시간센터 연구원은 “제도 시행을 앞두고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도 긴장감을 갖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의욕적으로 방법을 마련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정부의 유예조치로 기업들에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영옥 선임연구위원은 “어려움을 겪는 업종에서도 새 제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제도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mail protected]>